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끝까지 사랑입니다. 끝까지 사랑은 극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처한 극한 상황은 체포당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상황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과정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묶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된 후에 1차 종교재판이 열립니다. 1차로 대제사장 앞에서 신문을 받으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직 제사장의 장인이며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 앞에서의 신문입니다. 그 신문과정에는 크게 두 가지의 장면이 클로우즈 업 됩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과 또 하나는 안나스가 예수님을 신문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끝까지 사랑을 볼 수 있고, 안나스의 신문과정에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재판받으면서도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였다면 지금은 어쩌실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의 마음을 갖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문지기 하녀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동산에서 함께 있던 장면을 목격한 증인 앞에서도 예수님을 힘주어 부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재판정에서 세 번을 부인했어도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돌려 베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정죄하는 눈으로 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할 마음을 이미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것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왜 세 번을 반복하실까요?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번 풀어줄 이유가 있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두 번째 장면으로 가보겠습니다. 신문 장면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침묵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신문하십니다. 주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고 군병들도 있고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신문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1)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는 것, 2)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두 개를 한 번에 묻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침묵하시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첫 째 질문에는 침묵하시고, 당신을 주장하기 위해서 둘 째 질문에 대해서는 법대로 변론을 하십니다. 이 당당함이 보이십니까? 재판받는 중에도 예수님은 평정을 유지하십니다. 무엇을 침묵해야 하고 무엇을 대답하여야 하실 줄을 아십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법대로 변론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평정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분은 아버지의 뜻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분이 져야 할 십자가는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도 침묵할 때는 침묵하고, 변론할 때는 변론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십자가를 묵상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현재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큰 소리로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