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에도 우열이 있을까요? 성경은 있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 귀한 것이겠습니다만 그러나 어느 것이 교회를 세우는데 더욱 역할을 잘하느냐에 따라서 우열을 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은사가 더욱 공익을 위해 쓰임 받느냐에 따라서 우열을 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자랑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섬기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만약 은사를 자랑하든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를 자기 신앙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추구하기도 합니다. 또어떤 사람은 은사를 받은 것을 자기가 더 많은 은총을 입었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은사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사를 자신이 관리하고 조정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은사를 자랑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받았으면 어찌하여 마치 안 받은 것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특히 방언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미 구원의 완성을 받은 자들이 하는 천상의 언어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무질서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방언이 자기 자신의 신앙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를 세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지금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데 사랑이 필요합니다.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방언을 해 대면 누가 이해합니까? 아무도 이해를 못합니다.
이에 비해 예언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언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에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 이해합니다. 결국 그 예언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우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공익성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세우는데 어떤 은사가 더욱 유용하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더욱 공익적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누가 방언을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게 해주지 못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예언하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는 공익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은사라도 공익의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아주 우월한 은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빼어난 은사라도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열등한 은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