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성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1,000명이 있으면 1,000 가지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요. 저마다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이미지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는 재판관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judge 하시는 분이 아니고, nudge 하시는 분이십니다. nudge는 슬쩍 찌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 부드러운 손짓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벌주고, 비난하고, 언제나 못마땅한 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넛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런데 바울의 모습을 보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슬쩍 찔러서 새로운 일, 어떤 선택을 하도록 개입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일은 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일에서는 바울은 부자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하지만 부자유합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의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격입니다. 특히 경쟁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사역을 하는 중 방해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자유인으로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부자유인으로 행동한 그의 인격은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는 바울을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경쟁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의 세계에서도 얼마나 경쟁이 심한지 모릅니다. 부목사가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더 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혼난다고요? 아뇨. 보따리 당장 싸야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사울은 경쟁심 때문에 질투심이 있고요,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으나 기름 부은 왕을 죽일 수 없어서 죽이지 않습니다. 원래 변화되기 전의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경쟁심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의 탁월한 역사인식과 설교를 듣고 그를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질투심 때문이겠지요. 그랬던 그가 부활의 주님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인격이 변합니다. 성경에 아볼로를 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형제 아볼로를 두고 말하는데, 내가 그에게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지금, 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배경을 좀 아셔야 합니다. 아볼로는 언변이 빼어난 사람입니다. 에베소, 고린도에서도 그랬습니다. 특히 고린도에는 수사학을 중요시 여깁니다. 말 잘하는 사람을 중요시 여깁니다. 아볼로가 그곳에서 말씀을 잘 전해서 고린도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분란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기가 스타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바울이 아볼로를 경쟁자로 여기면서 시기 질투도 생길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경쟁심이 없습니다. 경쟁자가 없습니다. 에베소로 돌아온 아볼로에게 바울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이 그에게 형제라고 부르면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린도에 가라고 여러 번 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경쟁자들 많으시죠? 이렇게 말하면 고상한 질문이고요. 여러분 주위에 꼴 보기 싫은 사람들 많으시죠? 그러면 경쟁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경쟁심을 많이 느끼면 열등감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이긴자들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서해 달라고 대들면 아버지는 집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들입니다. 누가 우리의 경쟁자가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경쟁자는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방해자들이 없습니다.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에는 전도할 큰 문이 활짝 열려있고, 열매도 많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역을 방해하는 대적자들도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적자들도 많지만 동시에 전도대상자들이 너무 많아서 큰 문이 활짝 열렸으면 대적자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입니다. 대적자들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대적자들, 우리를 방해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면 방해자들이 있으나 없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바울이 어디를 다니면서 사역을 하던 자유입니다. 자유가 있지만 그것도 조건적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개입이 없으면 다 자유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개입이 있으면 중단합니다. 주님의 허락 하에 가는 것이니까 사실상 자유가 없습니다. 부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젊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자유하나 부자유했습니다.
경쟁자 두려워 마십시오. 별거 아닙니다. 방해자 두려워 마십시오. 사역의 문이 있는지 보십시오. 주님 때문에 부자유하다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