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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빌 김 키잔 인터내셔널 회장, 스미소니언 이민사 박물관 한국관 대표로 선정 20년간 전시



 
오는 7월 1일 개관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 이민사특별전시회에 한국관의 대표 인물로 빌 김(한국명 김시왕) 키잔 인터내셔널 회장이 선정됐다.
빌 김 회장은 스미소니언의 ‘Many Voices, One Nation’이라는 주제로 열린 미국이민사에 대한 17개국 특별전에 한국관 대표 인물로 뽑혔다. 그의 이야기와 사진, 밥상이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2017년 7월 1일부터 2037년 6월 30일까지 20년간 무료로 전시된다. 살아있는 한인 이민자의 삶이 귄위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에 전시된다.
이와 관련해 빌 김 회장은 22일 한강에서 김동기 총영사와 샘 윤 CKA회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회장은 나는 아직도 왜 내가 뽑혔는지 알 수 없다 . 2013년 스미소니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농담인줄 알고 믿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립미국사 박물관이 유럽 위주의 이민사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이민 온 전세계 사람들 가운데 성공한 인물을 선정해 이들이 소장한 옛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는 지난 100년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대륙 출신의 이민자가 늘며 이들을 현대 이민사에 편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 한국, 중국, 타이완,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 쿠바, 베네수엘라, 칠레,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이외에도 총 17개국에서 한 명의 대표를 선정해 보통 사람들의 아메리칸 드림 성공 이야기를 전시한다.
빌 김 회장은 1964년 단돈 50불을 들고 김포공항에서 대만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팬암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고 다시 LA본토로 입성했다. 당시에는 한미 직항이 없었을 뿐 아니라 프로펠로 비행기로 장시간 항해가 불가능해 중간 기착지를 거쳐야 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과정에 경유지가 많았듯 그는 194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61년 서울로 상경했다 다시 18세에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미국행은 가난 탈출,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미국은 1900년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위한 이민자를 받아들였지만 2차 대전을 전후해 공식이민을 막았다. 그러던 이민이 린던 B 존슨 대통령이 취임 후 다른 대륙 이민을 허용했다.
빌 김 회장은 이보다 일 년 앞선 1964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입성했다. 또한 그 보다 2년 먼저 그의 형 김시면 씨가 미국에 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도 형도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 김 회장은 파라솔 뼈대에 페인트 칠 하기, 접시닦기, 철판공장, 가게 점원, 잔디깎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도 손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형과 김 회장은 한국의 부모에게 돈을 보냈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김 회장은 공부의 끈은 놓치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외국인에게 랭귀지를 가르치는 대학에 다니며 신분상승을 꿈꿨다. 막노동의 불법체류자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는 엘카미노 커뮤니티 컬리지를 마치고 UCLA 전기공학과에 진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그는 랭귀지 스쿨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부인 메리 김 (한국명 이명순)을 만났다. 유학이 흔치 않을 당시 한인 유학생 부부가 탄생했다.
1968년 결혼을 하고 1969년 첫 아들이 태어나고 1971년, 1972년 연년생으로 딸을 뒀다. 결혼과 자녀들로 인해 당시 베트남 전쟁 징병 최우선 순위 1A이였으나 후순위로 밀리고 결국 징집을 면했다. 그의 이민사에는 한국의 이민사와 미국의 역사가 함께 한다.
빌 김 회장이 LA에 도착했을 당시 한인인구는 2천명 정도, 한 식당 한 곳과 한인 교회 세 곳이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다. 그는 1967년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 진 후 공장을 그만 두고 세일즈를 했다. 거주지도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당시 가발이 인기를 얻고 있어 1972년 가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가발 사업이 사양길로 들어서 어려움을 겪고, 전자시계 사업에 도전했다. 그도 여의치 않아 1976년 Kizan International 이라는 의류회사를 설립하고 남자 바지 사업에 도전했다. 이후 성공가도를 달리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생산은 인건비가 저렴한 한국에 주문자상표부착(OEM)방식으로 만들어 미 전역에 공급했다. 김 회장은 당시 자신이 바지 생산을 주문한 하청업체 중 대우실업, 삼성물산, 태광물산 등은 나중에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생산물량의 80%를 한국에서 만들던 김 회장은 1988년 한국올림픽 이후 원가와 인건비가 올라 생산지를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등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대표 유통업체인 메이시, JC 페니, 타겟 등에 키잔 인터내셔널 기획 제품들이 팔리고 있고 또한 자체 루이스 라파엘 이라는 남성용 브랜드를 갖고 있다. 빌 김 회장은 미국에서 청바지를 제외한 남자 바지의 20 %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 한 해 매출은 1억 달러에서 1억 5천만 달러 안팎이다. 더욱이 키잔 인터내셔널은 지난 1990년 단 한번을 빼곤 계속 흑자를 내고 있다. 50달러를 들고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왔던 그는 꿈을 이룬 이민자로 볼 수 있다.
한편 빌 김 회장은 사업의 성장과 더불어 지역사회 봉사에 눈을 돌렸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시안 아트뮤지엄의 시티 커미셔너로 18년간 봉사했다. 2006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빈곤층을 돕는 Give2Asia 재단 이사장을 맡아 총 3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마련했다. 아내 메리 김도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 파운데이션(KACF) 이사로 참여해 한국계 노년 이민자와 어린이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부창부수 김 회장 부부는 1986년 스탠퍼드대학에 개설된 한국어과가 재정난으로 폐지될 것이라는 소식에 자택에서 기금모금 행사를 열어 8만 5천 불을 모아 지원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김 회장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인 정치력 신장에 앞장서는 CKA에 참여한다. 그는 한인 커뮤니티의 높아진 위상에 비해 한인 정치인 배출은 저조하다. 한인 연방상하원을 배출해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CKA 같은 단체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샘 윤 CKA회장은 지난 5년간 빌 김 회장님이 CKA멤버로 참여해 한인들이 주류정치 참여 및 한인2세들의 연방상하원 도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계시다고 말했다.
빌 김 회장은 1남 2녀, 손녀 만 4명이다. 아들은 싱가포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고, 장녀는 LA에서 큐레이터, 차녀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각자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김동기 총영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미국사회의 포용력과 한국을 모국으로 가진 것은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큰 자산이라며 이번에 보통사람의 이민문화 성공 스토리와 그 분들의 모국의 문화를 전시하는 이민사 박물관에 한인 이민사를 소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전시회에는 대만계 제리 양 야후 공동창업자, 독일계 게르트루드 보일 콜럼비아 스포츠 회장, 팔레스타인계 엘리 하라리 샌디스크 창업자, 칠레계 주앙 파블로 카펠로 P.A.그룹 창업자 등 미국에서 성공한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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