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행위구원을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믿음구원을 말한다고 간단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구약에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에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행위로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고 행위는 필요 없다든지, 행위만 필요하고 믿음은 필요없다든지 그렇게 간단히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다 의롭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의 각도에서 접근을 하여야 합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나라=그의 의입니다. 의는 경건의 실천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의란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고 그 의는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의를 실천하는 가장 바른 첩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선(alms)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돈을 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전과 회당에서 헌금하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헌금도 포함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셋째가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세 가지라고 여겼고, 예수님도 그것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였습니다. 참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의를 실천하는 방법이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포함해서 성전에 헌금으로 내는 것도 자선이라는 것, 그리고 기도와 금식도 포함됩니다. 이로 보건데 의의 실천은 경건의 실천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이것은 경건의 실천의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의를 실천하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6:1)”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를 사람 앞에서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의의 실천 방법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자선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금식에 대해서가 그것입니다. 첫째, 자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선을 행할 때 은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은밀하게 행할 때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를 보십시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3.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4.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이라고 하면 헌금도 포함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자선을 행할 때 또는 헌금을 할 때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당에서 자선을 행하는 것은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자선을 행하는 것은 직접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팔을 불지 말라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물론 그 뜻은 확성기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할 때 그 연보함이 나팔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유대인들은 공개적으로 금식의 시기에 나팔을 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헌금을 받기 위해 성전 금고에 13개의 나팔모양으로 된 헌금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는 대중들에게 그들의 자선을 보이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행위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위선자들입니다. 위선자는 배우, 연출자입니다. ..인 채 하는 사람입니다. 가면을 쓴 사람입니다. 경건을 가장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로 허영심입니다.
왜 사람들은, 특히 종교인들은 의의 실천에 관한 한 그렇게 허영심이 많을까요? 믿기 전에는 그렇게 허영심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소속이 되다보면 종교적 허영심이 배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에게 인정받고 싶고, 담임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하고, 예전에 저는 집사 때였습니다. 제가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목사님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제가 등을 밀어주었습니다. 그게 너무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가수나 배우들 찐팬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사가 되고 나니까 목사님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목사님께 인정받으면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나중에 보니까 다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 많이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목사님이 인정해 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결혼 때 받은 다이아 반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개척교회에 다닐 때 건축헌금을 한다고 하길래 그 반지 바쳤습니다. 목사님이 사람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해 주면 저는 기분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얼마나 갑니까?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보상입니다. 하나님의 보상만이 영원합니다.
삶의 매순간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보통의 삶의 순간에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잘 동의가 안 됩니다. 자선하고, 헌금하고, 이 같은 특별한 시간에만 가장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18세기 유대신비주의인 하시디즘이라는 파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든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일하고, 먹는 일, 매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두가 거룩함의 광채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드러날 때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시디즘의 세계관은 “유대인의 삶의 과제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기도를 말로 표현하거나 특별히 유대적 방법으로 어떤 일을 행함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순간 속에서 그 가능성을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서 가능해진다.”
헌금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인 삶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헌금하는 시간만 사람들에게 잘 보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선을 행할 때 은밀하게 하셔야 경건의 실천이 됩니다. 헌금 할 때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