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na 24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4가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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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모든 사람들이 잠자는 휴일의 새벽 시간,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휴전을 하기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 전쟁을 회고하며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열악했다. 병력은 북한군 201,050명의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갈볼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이 외에도 정치 외교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Harry Truman)이었다. 그는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 때에는 애치슨 선언(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리 그래함은 한국에서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이 자유와 평화의 파수군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여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둘째, 유엔 상임이사국의 참전 결정도 기적이었다 : 무초(John J. Muccio) 대사가 남침 사실을 보고한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25일 오전 10시였다. 25일 저녁 유엔 대표부가 안보리 소집 요구서와 결의안을 제출했다. 28일 유엔은 제2차 안보리를 소집하여 유엔 연합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이런 신속한 회의와 결정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대만), 소련이 상임이사국이었고 이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북한 편인 소련이었다. 그런데 그날 소련 대표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점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의문 중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미스터리이며 기적이다.  어쨌든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의하여, 당시 전체 국가는 93개국이었는데, 이중 67개국이 한국을 도왔다. 전 세계 국가들 중 72%가 한국을 도운 것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기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한 북한군은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8월 말 낙동강까지 진출했고,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남은 지역만 점령하면 남한을 거의 전부 점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수뇌부는 인천으로의 상륙 시도는 성공률이 5천분의 1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10m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도 상륙을 어렵게 하지만, 수로가 좁아 대규모 선단의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상륙을 위한 LST(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가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미터 이상 되어야해서, 썰물 때는 작전이 불가능했다. 결국 상륙작전은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좁은 수로에 기뢰를 매설할 경우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미친 짓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고 대통령을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9월 15일 총 7만 5천명이 투입된 작전이 시작되었다.  성공률이 5천분의 1에 불과했으나, 작전은 성공했다.  9월 16일에는 인천을 탈환했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5천분의 1의 성공률을 성취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군 전문가들은 ‘세기의 도박’이라고 불렀다.  

넷째, 흥남 탈출은 기적이었고 기적의 항해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19일 중공군이 개입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엔군은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후퇴했다.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주민들은 피난을 서둘러,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찬 흥남 부두’에는 짐 보따리와 가족,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이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 흥남철수 작전이다. 이 작전 지휘관이 제10군단장 알먼드소장이었다. 1950년 12월 24일까지 약10만 5천 명의 군병력과 피난민 10만 명, 전투장비와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었다.  흥남에서 마지막으로 북한 피난민을 싣고 나온 배가 미국 국적의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당시 이 화물선에 태울 수 있는 여유 정원은 12명이었는데, 이 배에 1만 4천명이 탑승했다. 이보다 더한 콩나물 시루는 없었을 것이다.  23일 오후 흥남부두를 출발하여, 적군이 설치한 4천개의 기뢰를 피해 영하 20-4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폭설을 견디며, 24일 낮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은 이미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다시 거제도로 향했다. 기적의 항해였다. 의사도 약도, 음식도 없고, 마시지도 못했으며, 추위에 굶주리고 화장실조차 이용하기 어려웠으나,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3일간 800km를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 포항에 입항했다.  항해 중 다섯 아이가 태어났다. 피난민들이 완전히 하선한 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   이 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탑승했고, 교회 단위로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핍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해상탈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탈출이자, 지고한 인도주의 정신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기독일보, 2020. 6. 19 오피니언 가운데 요약 발췌)   

진정 기이하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간섭하사, 기독교 한국, 선교 한국을 세우셨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건재하는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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