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우월감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놓치는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금식 논쟁도 그 중 하나입니다. 간단한 논쟁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세인들은 자주 금식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예수님이 받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질문을 받으실 때 질문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금식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보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금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마음 바탕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9:16-17) 유대인들은 슬퍼하기 위해서 금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쁨을 되찾기 위해 금식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위해 금식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집 잔치를 회복하기 위해 금식합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으로 자기를 비웁니다. 겸손해 집니다.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되돌아갑니다.
그리스도는 새 포도주입니다. 유대 율법주의는 옛 포도주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베조각입니다. 율법주의는 낡은 옷입니다. 그리스도는 새 가죽 부대입니다. 율법주의는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담으려면 엣 가죽 부대는 안 됩니다. 새로운 가죽 부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 바탕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바탕은 무엇일까요? 기쁨입니다. 긍정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바탕은 무엇일까요? 슬픔입니다. 무거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의인이라고 칭해집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감격합니다. 천국을 소망합니다. 율법주의는 행위 중심입니다. 율법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믿음 중심입니다. 예수 중심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전자는 건조한 가죽 부대입니다. 탄력성이 없습니다. 후자는 새로운 가죽 부대입니다. 탄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분을 향하여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보면 여러분의 마음의 바탕이 새 부대의 사람인지, 낡은 부대의 사람인지 압니다.
어떤 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해 주셨다. 감사하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사랑으로 감격 하신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분이 있습니다. 새 가죽 부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어나서 ‘나는 오늘 무슨 행동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나는 죄 투성이야. 아! 우울하다.’ 이렇게 우울하게 시작하는 분 들은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기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슬픔의 금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내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신랑을 빼앗긴 날입니다. 금식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잔치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가끔 그리스도를 빼앗겼다고 생각되면 금식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