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는 최초의 사막의 수도사입니다. 오랜 동안 훈련을 하였고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닮은 면은 예수님처럼 병든 자를 고치는 은사를 받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했다는 것, 둘째로 예수님을 닮은 면은 예수님처럼 겸손해서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겸손한 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한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린 딸을 데리고 사막으로 안토니우스를 찾아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 딸을 바로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안토니우스는 어머니와 딸에게 묻습니다. “당신 딸의 질병을 예수님이 고쳐 주리라고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집에 도착하면 그 믿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도착하자 그의 딸의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안토니우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심을 찬양하였습니다. 만약 안토니우스가 사막에서 그때 고쳐주었더라면, 안토니우스는 스타가 되고, 사막까지 찾아간 그들의 행위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배려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이 드러났고, 그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안토니우스의 배려심과 겸손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화려한 능력과 이적을 행하는 사람치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운 사람은 드뭅니다. 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한 한 여인을 고치는 장면과 예수님이 죽은 회당장인 야이로의 12살 외동딸을 살리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정확하게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고,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고, 결국 그 딸도 살려내십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불치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낸 것입니다. 얼마나 화려한 장면입니까? 모든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건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 장면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두 사건에서 특이한 말씀과 행동을 하신 것이 우리의 눈에 띕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군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져서 병이 나은 그 여인을 군중 가운데서 굳이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두려워 떠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냥 병에서 나았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찾아내서 그런 말씀을 한 장면이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모들에게 특별히 부탁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벗어난 말씀들이나 행동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관심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괄호 안의 일에 대해서 잘 묵상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미 혈루병이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굳이 그 여인을 군중에서 찾아내십니다. 예수님이 군중에서 찾아내시는 행위 등은 괄호안의 일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이미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모에게 이일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살아난 즉시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딸이 평소에 피자나 햄버거를 좋아했다면 예수님이 피자나 햄버거를 갖다 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들, 이런 행위들은 이 사건에서 괄호 안의 일들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닮아 가려면 이런 괄호 안의 삶을 잘 배우셔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병 고치는 은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괄호 안의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괄호 안의 삶에서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을 우리가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12살 어린이에 대한 배려는 무엇일까요? “너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신비한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것을 원친 않으셨습니다. 죽었다 산 사람이 아니고, 깊이 잠자고 있는 질병이었는데 아버지 야이로의 그 믿음 때문에 깨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특히 아이가 깨어난 후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배려의 극치를 배웁니다. 아이에게 신비로운 인물, 특별한 사람이라는 허영을 먹이지 말고, 지금은 피자나 맥도날드 먹을 때이니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기가 막힌 배려입니다.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을 굳지 찾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를 위한 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찾은 후에 떨고 있는 그 여인에게 완성시켜줍니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이 선언을 듣지 않으면 그 여인의 치유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그 여인의 치유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 여인이 치유된 것은 예수님 옷자락 만지는 행위가 아니고 그의 그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만약 이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그 여인은 치료를 받았지만 온전한 치유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신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옷 만지니까 나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옷이 우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화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배려심을 배울 때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