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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결핵퇴치에 앞장선 로이스 린튼 선교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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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교(WWMA) 개강예배 마친 후 블랙마운틴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로이스 린튼(Lois Linton, 한국명 : 인애자, 1927년생) 선교사께서 별세(9월 7일)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침대 낙상사고(뼈 골절)로 인하여 수술 중에 깨어나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셨다’고 제임스 린튼(그녀의 셋째아들) 선교사가 전해 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한국에서 사역하셨던 살아계신 최고령 선교사였을 것이다.  지난 6월 20일, 강태윤 선교사 부부와 청년 리더들과 함께 블랙마운틴을 방문하고 그곳을 떠날 때 뵈었던 마지막 모습… 또 오라시던 그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저며온다.

로이스 린튼 선교사는 1947년, 휴 린튼(Hugh Linton, 1926년생) 선교사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 휴 린튼(별명, 순천의 검정고무신)은 1895년 내한하여 사역했던 유진 벨 선교사(호남 선교의 아버지)의 사위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셋째 아들이다.

그 윌리엄 린튼 선교사에 의해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되었다.  한국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휴 린튼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종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의료 및 선교사역에 헌신하였으며 등대선교회를 설립,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도서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30여년간 결핵퇴치에 헌신했다.

1960년, 순천 일대에 홍수로 인해 결핵이 크게 번지자 순천 기독치료소를 설립하여 결핵치료에 나섰으며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순천결핵재활원(현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을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한국 땅에서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휴 린튼 선교사는 1984년 4월 10일, 전남 순천에서 음주운전 버스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을 잃고 전라남도 광주기독병원까지 택시로 이송(당시에는 앰뷸란스가 없었음)하던 중 과다 출혈로 별세(당시 58세)했다.

그 후 그의 막내아들, 존 린튼(John Linton, 한국명 인요한, 1959년생)이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여 그 때부터 한국에도 앰뷸런스가 보급, 시행되었다.

한편, 후 린튼과의 사이에서 5남 1녀의 자녀들이 태어 났으며2023년 현재, 그녀의 자녀들은 Well Spring,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이라는 선교단체를 통해 대를 이어 한국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은퇴 후 블랙마운틴(in NC)에 거주하며 사시다가 별세한 그녀의 유해는 한국으로 보내줘 남편이 묻혀계시는 순천에 안장될 예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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