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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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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빠르게 흘러, 김에스더가 16세가 되었다. 아버지 김홍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두 명의 언니들도 결혼을 했다. 에스더의 어머니와 친구들은 14세 이전에 결혼을 하던 조선의 풍습을 따라, 에스더도 하루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심지어 에스더가 일하던 시약소(Dispensary) 환자들마저도, 에스더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 큰 처녀가 결혼을 안했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라고 수군댔다. 당시 조선 사회에선, 기생이나 장애나 병이 있지 않는 이상, 16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성화와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드디어 한 사람이 물망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박여선[1], 윌리엄 홀에 의해 마부로 고용되어, 기독교로 개종한, 언제나 정직하고 온화하며, 겸손한 청년이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사회에서 일하는 여자와 집에서 가족을 위해 음식과 바느질만을 잘 할 수 있는 여자 중 누가 더 좋은 지를 묻는 윌리엄 홀의 질문에, 박여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여자가 더 좋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난 후, 윌리엄 홀은 에스더의 신랑감으로 박여선을 추천할 수 있었다.

에스더는 박여선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박여선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때의 심정을 에스더는 로제타 홀에게 편지로 고백했다.

“저는 그의 신분이 높다거나 낮은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신분이 높든 낮든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2]

드디어 1893년 5월 24일, 에스더는 박여선과 결혼을 하고,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리게 된다.[3]

조선의 전근대적인 여성관을 벗어나길 원했던 에스더와 조선 시대 남성관을 깨고, 아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박여선의 만남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였으리라.

그로부터 1년 후, 1894년 5월 8일, 태어난 지 아직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을 데리고, 로제타, 윌리엄 홀 선교사는 평양 개척 선교의 사명을 띠고 평양에 도착하게 되는데, 박여선과 임신 중이었던 박에스더 부부도 동행한다.

당시 평양은, ‘조선의 소돔’[4]이라고 불릴 정도로, 박해가 심했던 곳이었고, 도착하자마자 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었지만, 에스더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로제타 홀의 평양 선교 활동을 훌륭하게 도왔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평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평양 도착 한 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런 와중에 에스더는 아기를 출산한다.

“셔우드가 이제 집안의 유일한 아기이다. 에스더 이모가 몸무게가 겨우 4파운드(1.8kg)밖에 되지 않는 귀여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셔우드가 아기를 너무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인형 손 같은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그런데 아기는 겨우 36시간 동안 에스더 이모 방에 머문 뒤, 주님께서 그 작은 아기를 당신께로 데려가셨다.”[5]

1894년 9월 10일, 로제타 홀의 육아일기에 의하면, 박에스더의 첫 아기는 미숙아였던 것 같다. 그리고 첫 아이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둔다. 평양 선교 기간 중에 겪었던 박해 사건의 충격과 임신 중에 평양까지 갔다 오는 힘든 여행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곧 또 다른 슬픔이 다가온다.


[1] Rosetta S. Hall Ed.,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Eaton & Mains, 1897, 392-395쪽. 로제타 홀은 윌리엄 홀 순직 후, 그를 기념하는 책을 만들면서, 박여선에게 추모의 글을 부탁하는데, 이 책에는 박여선이 한글로 쓴 글을 에스더가 영어로 번역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박여선이 뉴욕 리버티에 머물고 있을 당시인 1897년 8월에 작성됐다. 이 글에 의하면, 박여선은 윌리엄 홀이 1892년 순회전도를 하며, 평양을 방문할 때, 마부로 고용됐던 사람이다. 훈장이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서울로 올라와 마부 일을 하고 있었던 박여선은, 평양으로 가는 윌리엄 홀과의 여행을 통해, 그가 불편한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피곤한 중에도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게 되어,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229쪽.

[3]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문화를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초기 기독교 여성들도, 서양 여성처럼, 결혼 후 남편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바꾼 듯하다.

[4]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1쪽.

[5]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305쪽.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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