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모두가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절a) 예수님이 산 돌이시기에, 그분께 연결된 우리도 살아 있게 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생명의 돌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생명을 소유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의 성전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이 성전이고, 그리고 그 개인들이 연합하여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혁명입니다. 그들에게는 보이는 성전만이 성전입니다. 그 보이는 성전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개인이 성전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에게 성전을 다시 짓겠다는 의미는 3일 만에 부활하실 자신의 몸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산 돌들이 될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b)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입니다. 성전인 성도들의 삶 전체가 제사입니다. 예배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노동도, 눈물도, 섬김도, 기다림도, 인내도, 사랑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제사가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직은 소수 성직자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제사는 동물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자체입니다.
영적 제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감사, 찬양, 자비, 섬김, 삶의 헌신, 예배당 안의 예배만이 아니라, 하루 전체가 제사입니다. “너희 몸을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라”(롬 12:1) 하나님은 오늘도 건물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함께 세워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집으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단순한 교회 출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산 돌이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입니다.
베드로는 제사를 더 이상 성전의 의식, 동물 희생, 특정 시간의 종교행위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제사는 “삶 전체”입니다. 그래서 일이 기도가 되고, 놀이가 기도가 되고, 십자가가 기도가 되고, 구송기도가 기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신약의 제사장직 영성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기도가 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영적 제사는 단지 찬양의 순간만이 아니라 견딤, 인내, 자기부인, 사랑 때문에 감당하는 고난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회복 중 하나는 “성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일”을 나누는 이원론을 넘어섭니다. 구약에서는 성전, 제사, 특정 공간, 특정 시간, 특정 사람 안에 거룩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전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고, 제사장이 공동체 전체로 확장되었으며, 제사가 삶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질문은 “이 일이 종교적인가?”가 아니라, “이 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가 됩니다. 그래서 세속적 전문성조차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의 진료는 치유의 제사, 교사의 가르침은 지식의 제사, 예술가의 작업은 아름다움의 제사, 사업가의 정직은 정의의 제사, 요리하는 일은 환대의 제사, 경청은 자비의 제사, 연구와 학문도 진리를 향한 제사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슨 일이든 교회 일처럼 열심히 하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 삶 전체를 거처로 삼으신다” 는 성육신적 영성입니다. 수도사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농부, 어머니, 기술자, 상인 모두가 하나님 앞의 소명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제사장적 삶은 종교 영역만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