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성경시대에는 건축을 하는데 머릿돌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건물의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돌들은 그 머릿돌을 향하여 정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건물의 방향과 위치가 정해집니다. 그때 머릿돌은 건물 전체의 정렬과 균형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머릿돌이 없으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나옵니다. 그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술도 바뀌었고 지금은 머릿돌이 예전의 머릿돌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준공 날짜 정도를 기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베드로는 이 머릿돌 이미지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역할과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결과를 그려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잇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벧전2:6)
하나님이 골라내고, 귀한 머릿돌 하나를 시온에 두셨습니다. 시온에 두셨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길은 두 가지입니다. 그 돌을 환영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그 머릿돌을 마음 중심 가운데 두고 믿든지 아니면 거부해야 합니다.
정확하게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의미는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 가운데 환영하고,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 돌입니다. 부활 생명의 돌입니다. 그 생명의 돌을 믿는 자, 모셔드리는 자는 역시 산 돌이 됩니다. 부활생명의 돌이 됩니다. 그 머릿돌을 중심 가운데 두는 자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장식이 아니라 기초입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지지만,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삶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예수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도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지막 날에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신앙인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미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그리스도를 붙든 삶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하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적인 창피함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다, 기대가 무너지다, 소망이 헛됨이 드러나다, 최후에 실망과 패배를 당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었는데 결국 헛된 선택이었다”는 판명이 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날 결코 ‘괜히 믿었다’ ‘헛되이 살았다’ 라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조롱당하셨고 침 뱉음 당하셨고 벌거벗겨지셨고 십자가라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기 “부끄러움” 역시 십자가의 공개적 수치를 의미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실패자로 보았습니다. “버린 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높이셨습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고, 수치 뒤에 영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미 그 길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지금 성도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손해 보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미련하게 보이게 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자는 결국 수치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잠시 수치를 당할 수는 있어도, 결코 최종적으로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